유송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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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송 무제 유유는 동진 말기 하급 군인 출신으로, 손은과 환현의 난을 평정하고 동진 안제를 복위시킨 인물이다. 그는 후연과 후진을 격파하는 등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유송을 건국했다. 유유는 토단법과 군현 통합 등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재위 3년 만에 사망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개혁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찬탈과 황제 살해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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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송 무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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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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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유유(劉裕) |
자 | 덕흥(德興), 덕여(德輿) |
아명 | 기노(奇奴), 지노(寄奴) |
묘호 | 고조(高祖) |
시호 | 무황제(武皇帝) |
생년월일 | 363년 4월 16일 |
출생지 | 징커우, 동진 |
사망일 | 422년 6월 26일 |
사망지 | 젠캉, 유송 |
능묘 | 초녕릉(初寧陵) |
재위 정보 | |
왕조 | 유송 |
즉위 | 420년 7월 10일 |
퇴위 | 422년 6월 26일 |
연호 | 영초(永初) |
후계자 | 유의부 |
가족 관계 | |
부친 | 유교 |
모친 | 조안종 |
배우자 | 무경황후(武敬皇后) 장씨 장황후 장태후(章太后) |
2. 생애
동진 말기 강남에서 손은이 난을 일으키자, 형주의 유력자 환현(桓玄)이 반란의 진정을 핑계로 건강에 들어가 제위를 빼앗자 팽성(彭城)의 하급군인 이었던 유유(劉裕)는 병사를 일으켜 손은과 환현을 무찌르고 안제(安帝)를 복위시켰다.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반란군의 잔당을 소탕한 뒤 북벌을 감행해 후진의 요홍(姚泓)을 멸망시켜, 그 명성과 북부군(北府軍)의 병권을 배경으로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건국 후 귀족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면서 정권을 안정화 시켰다. 이때부터 하급군인 출신 황제의 무력과 귀족의 정치력이 결합되어 남조의 독특한 사회체제가 시작되었다.
유유는 토단법(土斷法) 등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면서 화북에서 온 유랑자들을 강남의 호적에 편입시켜 동진시대의 황적(黃籍), 백적(白籍; 유랑자의 신분증명서를 말한다.)의 구별 철폐를 추진했다. 이로써 토착민과 유랑자 간의 과세의 균등화를 목표로 하였다. 무제는 동시에 군현의 통합을 추진하는 등 경제 재건을 그렸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그는 후사를 한문(寒門) 출신의 서선지(徐羲之), 부량(傳亮), 단도제(檀道濟), 사회(謝晦)에게 맡겼다. 그들은 2대 소제(少帝)를 퇴위시키고, 문제(文帝)를 즉위시켰다.
2. 1. 출신과 초기 생애
유송 무제 유유는 팽성군 팽성현 수여리(彭城 綏輿里, 쉬저우시 동산구(徐州市銅山区)) 출신이다.[172] 송서에 따르면 그는 전한 고조 유방의 동생 초왕 유교(楚王 劉交)의 21세손이라 한다.[172] 북제의 위수가 편찬한 『위서』 도이 유우전에는 "'''혹은 본래 성이 항씨였는데, 유씨로 고쳤다고 하나, 또한 찾을 수 없다.'''"[167], 즉 "원래 성은 항씨였는데, 후에 유씨로 고쳤다고 전해지지만, 이 설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는 불분명하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유송 무제의 생가 집안에 관해서, 북위 측 자료인 『위서(魏書)』의 「도이 유유전(島夷劉裕傳)」의 기술에 따르면 유유는 짚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68].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송서(宋書)』가 아닌 『위서』의 기술이 채용되었다[169].흥녕 원년 3월 임인(363년 4월 16일), 유교와 자오안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하급 관리(공조)였다. 생모는 산후 회복이 악화되어, 유유가 태어난 후 산열로 사망했다. 곤궁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는 어린 유유를 위해 유모를 고용할 돈조차 부족하여, 양육을 포기하려 한 적도 있었다. 보다 못한 생모의 누나인 자오씨가 대신 유유에게 젖을 먹였고, 거기에서 기노라는 어린 이름이 붙여졌다.[10] 증조부 유혼(劉混)은 원래 펑청(彭城, 현재 장쑤성 쉬저우시) 출신이었으나 징커우로 이주했다.[6] 유교는 한나라의 초왕 유교(劉交)의 20대손으로 알려졌는데, 유교는 한나라 건국자 고조의 동생이었다.[7] 유교는 경찰관이었고, 조안종은 군 지사의 딸이었다. 그들은 360년에 결혼했고, 가난하게 살았다.
아버지는 후처로 샤오원서우를 맞아 유도련·유도규를 낳았지만 유유가 어렸을 때 사망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유유는 약간 소유하고 있던 밭에서의 경작과 짚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성장한 후에는 신장이 7척 6촌으로 훌륭한 체격을 갖추고, 큰 뜻을 품었으며, 자질구레한 예절에는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계모에게는 잘 따랐고, 성실한 효자(효근)로 평판이 자자했다고 《송서》 무제기 상에는 기록되어 있으며, 가난했지만 성실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13] 그러나, 《위서》 섬이 유유전에서는,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해 버렸고, 글자도 거의 읽지 못하며 주변으로부터 핀잔을 들었고, 빚도 갚지 않고 거친 생활을 했다고 한다.[14]
2. 2. 군사적 성공과 권력 장악
유유는 팽성군 팽성현 수여리(彭城 綏輿里, 쉬저우시 동산구(徐州市銅山区)) 출신으로, 송서에 따르면 전한 고조 유방의 동생 초왕 유교(楚王 劉交)의 21세손이라고 한다.[172] 동진 말기, 강남에서 손은이 난을 일으키자, 형주의 유력자 환현이 반란 진압을 핑계로 건강에 들어가 제위를 빼앗았다. 팽성(彭城)의 하급 군인이었던 유유는 병사를 일으켜 손은과 환현을 무찌르고 안제(安帝)를 복위시켰다.[16][17][18]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반란군 잔당을 소탕한 뒤 북벌을 감행해 후진의 요홍(姚泓)을 멸망시켰다.[20][21][22]유유가 처음 벼슬을 시작한 것은 챔피언 장군 손무종의 사마(부관)로서였다.[15] 융안 3년 (399년), 오두미도 신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손은의 난에서, 유유는 북부군의 유뢰지의 요청으로 배하의 참부 군사가 되어, 불과 수십 명의 부대로 손은 군의 수천 부대를 격파하고, 스스로도 장도를 휘둘러 분전하는 등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16] 이 공으로 건무장군으로 승진한다. 융안 5년 (401년)에 다시 손은 등이 습격하여 건강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철수했다. 이를 철저하게 추격하여 해변으로 몰아냈다.[17] 이런 전란 때, 동진 군의 다른 무장들은 군율을 지키지 않고 민중에게서 약탈하여 크게 빈축을 샀지만, 유우대는 군기가 엄정하여 민중에게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18]
원흥 원년 (402년), 서부 군단을 이끄는 환현이 수도 구원의 명목으로 건강을 제압했다. 이때 유뢰지는 환현에게 투항하였고, 사마도자 등을 살해하고 실권을 잡았다. 유뢰지는 고립되어 자살했고, 유우도 환현의 지배에 속하게 된다. 원흥 2년 (403년) 10월, 환현이 안제 사마덕종을 폐하고, 국호를 초로 하여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환초). 이때, 환현은 유우를 높이 평가하여, 술자리를 여러 번 열어 정중하게 응대하고, 증여품도 두텁게 했다.
원흥 3년 (404년) 2월, 유유는 하무기 · 유의 · 제갈장민 등을 동지로 하여 환현 타도를 위해 결기했다. 유유는 경구에서 환현의 사촌인 환수를 베고 건강으로 향했다. 유유군은 불과 1700명이라는 적은 병력이었지만, 환현이 내보내는 병사는 모두 격파되었다. 환현은 강릉으로 도주하여, 유폐하고 있던 안제를 데리고 다시 동쪽으로 내려갔지만, 유의 · 하무기 · 유도규의 군대에 격파되어 강릉도 잃고, 5월에는 촉에서 풍천에게 살해되었다. 유유는 환현에게 추방당했던 안제를 복위시켰다. 환현 타도, 안제 복위의 공적으로 유우는 진군 장군 · 도독 16주 제군사로 임명되었다.
유유는 동진 국내에서 발언권을 높이는 한편, 환현의 잔당, 초종의 후촉, 노순, 남연, 북위등 주변 세력들을 토벌해야 했다. 의희 4년(408년) 1월, 양주 자사·녹상서사에 임명되었지만, 같은 해 9월, 유경선(유뢰지의 아들)이 후촉 토벌에 실패하여 중군장군으로 강등되었다. 의희 5년(409년) 2월, 남연군이 동진과의 국경 부근에서 대규모 약탈을 감행하여 약 천 세대가 피해를 입었다. 유유는 3월에 남연 정벌을 선언하고,[20] 7월에는 남연 수도 광고성을 포위했지만, 의희 6년(410년) 2월 함락까지는 반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같은 달, 유유의 부재를 틈타 노순은 광주에서 북상했다. 건강의 중간 지점인 예장에서 하무기를 패사시켰다. 유유는 남연의 선비족 3천여 명을 생매장하여 살해하고,[21] 급히 남하하여 4월에 건강에 입성했다. 유유가 건강의 방비를 제대로 정비하지 못하는 사이에, 노순군은 건강에 접근했다. 그대로 상륙하여 공격해 왔다면 패배는 불가피했지만, 노순이 관망하는 작전을 펼쳤기 때문에 최악의 사태는 회피되었다. 그 사이에 유유는 전투 가능한 병력을 서두성(石頭城)에 집결시켜 휴식 및 장비 재분배를 했으며, 주변 지역에서 집결해 온 구원 세력과 함께 각지에 병력을 배치했다. 그 결과, 건강 방어에 성공했다. 도망을 시작하는 노순군을 추격했다. 의희 7년(411년)에는 노순을 토벌했다. 남연 정벌, 노순 토벌의 공으로 태위로 승진했다.[22]
의희 7년(411년) 형주를 맡고 있던 유도규의 대임으로 유의가 파견된다. 의희 8년(412년) 9월에 유의 토벌을 표명하고 출진했다. 10월에 유의는 토벌되었다. 유유는 형주에 도착하자, 다시 후촉 토벌의 군을 일으켰다. 신진 장군 주령석에게 일임하고, 본인은 건강으로 귀환했다. 의희 9년(413년) 7월, 주령석은 후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건강으로 귀환한 유유는 쿠데타 결기 이후의 동지인 제갈장민을 주살한 후, 사회 등의 수중에 의해[23]토단을 시행한다. 동진의 황족 사마휴지가 유의 멸망 후의 형주에 부임하여, 임지에서 명성을 모으고 있었다. 유유는 의희 11년(415년) 1월, 사마휴지 등을 공격했다. 4월에 사마휴지는 후진으로 망명했고, 이로써 국내의 대립 세력을 일소했다.
후진에서는 요흥이 죽고, 그의 아들 요홍이 즉위했으나 혼란이 일어났다. 유유는 북벌을 감행했다. 의희 12년 (416년) 8월에 진군을 시작했다. 10월에는 낙양을 함락시켰다. 낙양은 서진 시대의 수도였으며, 역대 황제의 능묘가 존재한다. 이 땅을 확보함으로써 능묘의 수복이 이루어진 것은 동진에게 있어서 전례 없는 공적이었다. 그 때문에 유유는 송공에 임명되었다. 유유는 더욱 진군하여, 의희 13년 (417년) 8월에는 장안을 함락시키고 후진을 멸망시켰다. 이 공적으로 10월에 송왕으로의 진작이 건의되었다.
11월, 측근 유목지가 급사했다. 이 사태를 접한 유유는 급히 귀환길에 올랐다. 차남 유의진에게 장안의 운영을 맡기고, 그의 휘하 병력을 왕진악에게 통솔하게 한 뒤, 12월에 장안을 떠났다. 의희 14년 (418년) 1월에 팽성에 들어섰다. 여기서 다시 왕으로의 진작을 사퇴한다고 밝혔다. 6월에는 관위가 상국으로 올려졌고, 구석이 하사되었다. 한편 장안에서는 왕진악이 동료 심전자에게 살해당했다. 장안의 정세가 급격히 악화되었으므로, 10월, 유유는 유의진의 대리로서 주령석을 파견했다. 그러나 하의 혁련발발이 장안을 기습했다. 유의진은 몸만 겨우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주령석을 비롯한 많은 장군들이 전사했다. 그리고 장안을 잃었다.
2. 3. 유송 건국과 통치
유유는 팽성군 팽성현 수여리(쉬저우시 동산구(徐州市銅山区)) 출신으로, 전한 고조 유방의 동생 초왕 유교(楚王 劉交)의 21세손이라 한다.[172] 동진 말기, 환현이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빼앗자, 하급군인 이었던 유유는 병사를 일으켜 환현을 무찌르고 안제를 복위시켰다. 이후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반란군 잔당을 소탕한 뒤 후진을 멸망시키는 등 북벌을 감행하여, 그 명성과 북부군(北府軍)의 병권을 배경으로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건국 후 귀족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면서 정권을 안정화 시켰다.[25]유유는 황제 즉위 후 자신의 황위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 후진 정벌 당시 팽성에 들러 장량묘를 수리하고 그의 신중함을 기리는 덕을 칭송했으며, 후진 토벌에서 귀환하는 길에 공정의 은퇴 행사를 거행하여 "유유에게 장량"과 같은 연출을 했다.[111]
- 팽성에서는 유교의 묘를 수리하여 유교의 자손임을 강조했다.[112]
- 선양 자문 조칙에서는 유유가 계승해야 할 황위가 한나라에서 위나라, 진나라를 거쳐 계승되는 것임을 강조했다.[113]

유유는 토단법(土斷法) 등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면서 화북에서 온 유랑자들을 강남의 호적에 편입시켜 동진시대의 황적(黃籍), 백적(白籍; 유랑자의 신분증명서를 말한다.)의 구별 철폐를 추진했다. 이로써 토착민과 유랑자 간의 과세의 균등화를 목표로 하였다. 무제는 동시에 군현의 통합을 추진하는 등 경제 재건을 그렸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그는 후사를 한문(寒門) 출신의 서선지(徐羲之), 부량(傅亮), 단도제(檀道濟), 사회(謝晦)에게 맡겼다.
유유는 "창명(효무제의 자) 이후, 두 황제가 더 있다"는 예언을 꺼려 안제를 시해하고 공제를 옹립했다.[114] 의희 14년 12월(419년 1월), 중서시랑 왕소지에게 명하여 안제를 암살[24]하고, 그 동생인 사마덕문을 새로운 황제(공제)로 옹립했다. 영초 원년(420년) 6월에 공제의 선양을 받아 황제에 즉위했다.[25] 제위에서 물러난 공제를 영릉왕으로 강봉했지만, 이듬해 영초 2년(421년) 9월에 그를 살해했다.[26]
무제는 전 진(晉) 황제를 영릉왕(零陵王)으로 봉했다. 그는 계모 소태후(蕭太后)를 황태후로 받들었다. 그는 그의 형제 유도련(劉道憐),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조카들을 제후로 봉했다. 420년 가을, 그는 408년에 사망한 그의 아내 장애친(臧愛親)을 추존하여 황후로 삼았고, 그의 장남 유의부(劉義符)를 태자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제는 사마덕문(司馬德文)이 위협이라고 여겨 독살을 시도했다. 사마덕문에게 아들이 생길 가능성을 막기 위해 유유는 사마덕문의 아내 초공주의 형제 초수지(褚秀之)와 초담지(褚淡之)에게 초공주나 사마덕문의 후궁들이 낳을 남자아이를 모두 독살하도록 명령했다. 421년 가을, 유유가 보낸 병사들이 사마덕문의 집에 침입하여 사마덕문에게 독약을 마시라고 명령했다. 그는 불교가 자살을 금지하고 자살한 사람은 다음 생에 인간의 몸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거부했다. 결국 암살자들은 담요로 그의 머리를 덮어 질식사시켰다.
영초 3년 5월 계해(422년 6월 26일), 건강의 서전에서 붕어했다. 장남인 유의부가 즉위했다. 서선지, 부량, 단도제, 사회 등이 후사를 부탁받았다.
『후한서』의 저자인 범엽, 『삼국지』의 주석을 단 배송지, 오호 십육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인 도연명도 유유에게 몸을 담았다[27]. 또한, 『세설신어』의 저자인 유의경은 유유의 조카에 해당한다.
2. 4. 죽음과 유산
유유는 팽성군 팽성현 수여리(彭城 綏輿里, 쉬저우시 동산구(徐州市銅山区)) 출신이다. 송서에 의하면 그는 전한 고조 유방의 동생 초왕 유교(楚王 劉交)의 21세손이라 한다.[172]무제는 재위 3년 만에 죽고, 후사는 한문(寒門) 출신의 서선지(徐羲之), 부량(傅亮), 단도제(檀道濟), 사회(謝晦)에게 맡겼다. 그들은 2대 소제(少帝)를 퇴위시키고, 문제(文帝)를 즉위시켰다.
유송 무제는 현재 난징 동부 교외에 위치한 장닝 구에 있는 초녕릉(初寧陵, ''Chuning Ling'')에 묻혔다. 그의 신도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각상은 기린 마을의 기린푸춘("기린 마을")에 있는 길 건너편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기린''이다.[8]
유송의 무제는 남북조 시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의 지휘 아래, 남중국 제국은 북부를 수복하는 데 가장 근접했다. 그가 북서부에서 획득한 영토는 빠르게 상실되었지만, 그의 원정은 남조가 황하를 따라 방어하는 이점을 갖게 했고, 북쪽의 선비족 국가가 동화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독립적인 남중국 국가를 보존했다.
3. 북벌과 군사적 업적
손은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유는 수십 명의 병졸을 이끌고 정찰에 나섰다가 수천 명의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많은 부하가 살해당할 즈음 유경선의 원조를 받아 격퇴에 성공했다.[64] 이 일화는 후에 "혼자 수천 명을 죽이는 무용을 보였다"라고 전해진다.[65]
환현 타도를 위해 건강으로 쳐들어가는 중, 환현 군의 강장인 오보지(吳甫之)와 황보부(皇甫敷)와 조우했다. 이 전투에서 거병 동료인 단빙지가 전사하여 거의 궤멸될 뻔했으나, 유유(劉裕)가 직접 진두지휘하여 이 두 장수를 쳐 죽이고 역전승을 거두었다.[66] 유우는 그 전투에서 "병력의 허실을 다루는" 장면이 많다.
오두미도군과의 싸움에서는 성벽 위에 부상자나 병자를 배치하여, 몹시 피폐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방심한 적이 성내로 들어온 틈을 타 일망타진하는 작전을 썼다.[67]
적이 많고 아군이 적은 전투에서는, 굳이 아군을 나누어 복병을 많은 곳에, 다만 한 곳당 몇 명이라는 소수로 배치했다. 적군이 덮쳐오자 일제히 복병에게 깃발을 흔들게 하고, 종을 울리게 하여, 아군의 세력을 오인하게 하여 후퇴시켰다. 이 뒤 추격에 실패하여 반격을 받지만, 먼저 복병을 배치한 곳에서 시체의 장비를 벗겨 엉덩이를 걸치게 하고, 유유자적하게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함정의 기미를 의심하는 적군에게 유우는 반전, 공세로 전환했다. 과연 오두미도군은 더 큰 함정을 두려워하여 물러났다. 그것을 확인하고, 유우는 태세를 정비할 수 있었다.[68]
환현이 찬탈에 대한 의향을 환겸을 통해 유우에게 자문했을 때, 유우는 환현 타도를 결의하고 있었지만, 굳이 환현에게 찬탈을 권하는 듯이 말했다.[69]
유우 등이 경구성을 점거하자, 환현의 신하들이 늦게 도착했다. 유우는 성벽 위에서 "천자는 이미 구원받았고, 그 명을 받아 우리는 일어섰다. 역신 환현의 목도 곧 도착할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 와서 무엇을 하러 왔는가?"라고 협박했다. 물론 이 타이밍에서는 어느 쪽도 빈말이었지만, 환현의 신하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물러났다.[70]
유의 토벌 후, 건강으로 돌아오려던 유우를, 제갈장민은 죽이려 했다. 유우는 그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고, 귀환 일정을 위조하여 제갈장민의 계획을 통제하고, 자신은 그 뒤를 쳐서 일찍 건강으로 귀환했다. 제갈장민의 배후로부터 소환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음모가 드러났음을 깨달은 제갈장민은, 유우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후, 곁에 숨어 있던 정오에 의해 타살되었다.[71]
환현(桓玄) 타도 쿠데타 당시, 환현 추토에 앞서 환현에게 협력했던 태원 왕씨의 왕유·왕수 부자가 반란의 조짐을 보이자 즉시 처형했다.[72]
노순이 건강(建康)에 육박했을 때 명령 위반을 범한 서적특(徐赤特)을[73], 노순 추토 시 명령 위반을 한 위순지(魏順之)를 처형했다.[74] 특히 위순지는 위영지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공신이라도 위반자에게는 용서가 없는 유유(劉裕)의 자세는 병사들을 매우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건강 결전에서는 건강 북동쪽 산인 복주산에 복병을 배치한 후, 산의 남부를 방화했다. 마침 건강에는 북동쪽, 즉 복주산 방면에서 바람이 불어, 건강을 지키는 환현 군은 연기 너머의 유유 군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연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함성, 북, 꽹과리 소리에 시달려 공황 상태에 빠져 붕괴되었다[75]。
남연전 후 오두미도(五斗米道)의 건강 습격에서는 "적군은 많고, 우리 군은 적다. 이 상태에서 병력을 분산시키기라도 한다면, 우리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즉시 간파당할 것이다. 일단 전군을 석두성에 집결시켜 상황에 따라 각 거점에 파견한다. 저들이 우리의 방비를 갖추지 않은 곳을 공격해 오면, 그때 가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라고, 다소 소극적인 발언이 남아있다[76]。
건강 방위전에서는 남연전에서 입수한 선비족 병사를 곧바로 실전에 투입하여 전과를 올렸다[77]。
오두미도 군의 추토를 할 때, 유유는 미리 강 서안에 보병과 기병을 화계 준비를 갖춘 채 배치하여 결전에 임했다. 대기를 명받은 장병들은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했지만, 전황이 진행되면서 강한 동풍이 불어, 오두미도의 배가 서안, 즉 대기를 명받은 자들 앞으로 떠내려왔다. 눈앞에 무방비한 먹잇감을 얻은 장병들은 앞다투어 불을 질러, 오두미도 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78]。
후촉(後蜀) 공략 작전을 짤 때, 유유는 주령석과 공략 작전을 상의했다. 그러나 작전 내용은 어디까지나 상자 속에 넣어 비밀로 하고, 촉의 입구인 백제성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열어보았다. 내용은 "적은, 우리가 지난번 실패를 참고하여 공격해 올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게다가 그 뒤통수를 쳐라. 그리고, 양동을 적의 예상 루트에 파견하라"는 것이었다. 이 예측은 적중하여, 주령석은 성도 함락을 달성했다[79]。
오두미도와의 싸움에서는 "신궁"이라고 불리는 병기로 큰 타격을 입혔다. 또한 후진(後秦) 토벌을 북위에 방해받았을 때에는, 포위하는 북위군의 원군 3만 명을 대노 100장을 사용하여, 불과 2700명의 보병으로 격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80]。
환현의 전횡이 심해지자, 유유와 하무기는 노순 정벌을 위해 회계로 나갔다. 거기서 하무기가 유유에게 거병을 제안했지만, 환현이 아직 찬탈을 하지 않았고, 회계가 건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환현에게 준비할 여유를 주게 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즉위 후, 목구멍과 같은 경구에서 거병하는 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원래 유유의 지원자인 회계의 귀족 공정의 제안이었다[81]。
반환현 쿠데타에 있어서, 광릉·경구·건강·역양과 같은 요충지에서 동시에 거병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했다[82]。 다만 이 계획은 건강에서 발각되어 참여자가 살해되는[83] 형태로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역양도 실패했다[84]。 광릉~경구의 일점 돌파 형태가 되었다.
오두미도군 추격에 있어, 유유는 뒤를 쫓아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루트 외에도, 당시 진군 루트로서는 일반적이지 않았던 해로를 통해 직접 적의 본거지 번우를 공격하는 작전을 제창했다. 이 작전은 매우 위험하여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통솔하는 손처 및 심전자는 유유의 기대에 부응하여, 오두미도군의 귀환에 앞서 번우를 함락[85]。 오두미도군은 귀환할 곳을 빼앗기 위한 싸움을 강요받았고, 그 도망 속도가 크게 둔화되었다. 이 작전을 전개함에 있어, 손처 등이 즉시 출격할 수 있었고, 도중의 임해에서는 유유의 처남인 장희가 물자 보급을 완벽하게 하고 있었던 점에서, 남연전을 일으키기 전부터 이미 유유가 해로를 상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희의 임해군 부임은 남연전 전이다[86]。
즉위 후 장군 서임에는 대 북위 시프트의 모습이 엿보인다. 장안에서 무관을 통과하여 옹주에 이르는 루트에는 생모의 동생인 조륜지를, 널리 국경을 접하는 황하~회수 지역에는 사촌 유회신을 수비 책임자로 임명했다. 관중과 촉의 경계 지역인 구지에서 반독립 상태였던 양성에게 차기대장군, 서량의 이흠에게 정서장군, 서진의 걸복치반에게 안서대장군, 고구려의 고련에게 정동대장군, 백제의 부여전에게 진동대장군의 관위를 각각 수여하여 북위에 대한 견제로 삼았다[87]。
3. 1. 남연 정벌 (409년 ~ 410년)
409년, 남연 황제 모용초는 진(晉)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약탈하여 남자와 여자를 포획해 악사로 훈련시키려 했다.[20] 이에 유유는 대부분의 조정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연을 멸망시키기 위한 원정을 결정했고, 맹창의 지지를 받았다. 유유는 409년 말 임구 전투에서 남연의 주력 부대를 빠르게 격파하고 남연의 수도 광고(산둥성 칭저우)를 포위했지만, 광고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21]410년 봄, 유유는 광고를 함락시켜 남연을 멸망시켰다.[21]
3. 2. 후진 정벌 (416년 ~ 417년)
416년, 유유는 후진의 황제 요흥이 사망한 틈을 타 후진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416년 겨울, 중요한 도시 낙양이 유유의 장군 단도제에게 함락되었다. 낙양 함락을 계기로 유유는 안제를 시켜 그를 송공(宋公)으로 봉하고 구석을 하사하게 하여 결국 황위를 찬탈하려는 의도를 드러냈지만, 그 당시 두 영예를 모두 거절했다.417년 봄, 단도제와 다른 장군 심림자는 후진의 가장 저명한 장군이자 황제 요홍의 숙부인 육공 요소와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한 달간의 전투 끝에 요소가 패배했고 분노 속에서 사망했다. 요소가 죽자 다른 후진의 장군들은 진의 군대에 저항할 수 없었다. 왕진악 (왕맹의 손자)이 지휘하는 유유의 함대는 빠르게 진격했고, 요홍은 먼저 심림자의 동생 심천지가 지휘하는 유유의 측면 부대를 파괴하려 했다. 요홍은 수적으로 큰 우위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천지는 그를 격파하여 그의 수도 장안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왕진악의 함대가 도착하여 후진의 마지막 저항을 격파하고 장안으로 진입했다. 요홍은 항복했고, 유유는 그를 건강으로 보내 처형하여 후진을 멸망시켰다.
3. 3. 서촉 정벌 (413년)
412년 말, 유유는 장군 주령석에게 교종의 서촉을 공격하도록 지시하면서, 비밀리에 그에게 부강 대신 민강을 통해 성도까지 우회하는 긴 경로를 택하도록 지시했다. 주령석의 군대는 413년, 교종의 주된 장군 교도부와 교종 자신을 기습하여 성도를 점령하고 서촉을 다시 동진에 병합할 수 있었다. 유유는 형주에 도착하자, 다시 후촉 토벌의 군을 일으켰다. 다만 친정은 하지 않고, 신진 장군 주령석에게 일임하고, 본인은 건강으로 귀환했다. 주령석의 기용은 물의를 빚었지만, 의희 9년(413년) 7월, 주령석은 후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23]3. 4. 기타 군사 활동
유유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남조 송나라의 기틀을 다졌다.409년, 남연 황제 모용초가 진(晉)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자, 유유는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연 정벌을 감행했다.[64][65] 409년 말 임구 전투에서 남연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고, 남연의 수도 광고(廣固, 현대의 산둥성 칭저우)를 포위했다.[66] 410년 봄, 광고를 함락시켜 남연을 멸망시켰다.[67]
같은 시기, 육손과 서도부가 북쪽을 공격해오자 유유는 재빨리 건강(建康)으로 돌아가 방어에 나섰다. 하무기(何無忌)와 유이(劉毅)가 이끄는 군대가 패배했지만, 유유는 건강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육손을 尋陽으로 몰아냈다.[68] 이후 손처(孫處)와 심전자(沈田子)에게 함대를 이끌고 번우(番禺)를 공격하게 하여 육손을 완전히 격파했다. 육손은 교주(交州, 현대의 북부 베트남)로 도주했으나, 그곳에서 주지사 두혜도(杜慧度)에게 패배하고 자살했다.[69]
유유는 오두미도군과의 전투에서 다양한 전략을 활용했다. 성벽 위에 부상자와 병자를 배치하여 적을 방심하게 만들거나, 복병을 활용해 적의 세력을 오인하게 하는 등 뛰어난 지략을 선보였다.[70] 또한, "신궁"이라는 병기를 활용하고, 북위군의 원군을 대노 100장을 사용하여 격파하는 등 우수한 무기 활용 능력도 보여주었다.[71]
후촉(後蜀) 공략 당시에는 주령석과 비밀리에 작전을 수립하고, 백제성에서 작전 내용을 공개하여 적의 허를 찌르는 전략으로 성도 함락을 달성했다.[72]
환현(桓玄) 타도 쿠데타 당시에는 광릉, 경구, 건강, 역양 등 요충지에서 동시에 거병을 계획하는 등 치밀한 전략을 구상했다.[73] 비록 건강과 역양에서의 계획은 실패했지만, 광릉과 경구를 중심으로 거병하여 환현을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
유유는 즉위 후,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장안에서 무관을 통과하는 요충지에 조륜지를, 황하와 회수 지역에는 유회신을 배치하는 등 전략적인 장군 임명을 단행했다.[74] 또한, 양성, 서량의 이흠, 서진의 걸복치반, 고구려의 고련, 백제의 부여전에게 관위를 수여하여 북위에 대한 견제를 강화했다.[75]
4. 내정과 개혁
환현 타도 후, 환현의 부하가 되었던 조규를 처형하고, 조씨의 광대한 토지와 재산을 빈민에게 분배했다.[88] 회계군에서 토착민, 망명자를 사적으로 숨겨주던 회계군 고래의 명족 우량을 적발하여 처형했다.[89]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형해화된 지 오래된 수재와 효렴 제도를 재정비했다.[90]
정선지전, 하숙도전에 유유가 대두하던 시기의 기술에 "신제"라는 말이 보이며, 이것이 가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현장급 이상의 관리가 부모 간호를 이유로 직무를 떠나려 할 경우 금고 3년의 벌을 과한다"[91], "강도를 한 자는 참수형, 그 가족도 공개 처형"과 같은 내용이 《송서》에 남아 있다.[92] 유의를 타도한 직후, 강릉 백성들에게 압정으로 인한 피폐를 염려하여 조세 부역의 면제를 선언했다.[93]
황제 즉위 후, 국내 각지에 대사를 파견하여 각지의 상황을 청취했다.[94] 동진 시대에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북부와 서부를 각각 황족이 다스리도록 정했다.[95] 유방과 유수에게는 사관을 거부당한 은자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유유 정권에서도 대옹, 종병, 주속지, 왕홍지, 완만령, 공순지, 유응지, 공기, 도잠, 종욱지, 심도건, 곽희림, 뇌차종과 같은 인물들이 유유의 초빙을 거부하고 은거했다. 《송서》 편찬자인 심약은 그들의 행동을 비판하고 있다.[96]
4. 1. 토단법 실시
4. 2. 군현 통합
4. 3. 기타 정책
유송 무제는 환현 타도 후 환현의 부하가 되었던 조규를 처형하고, 조씨의 광대한 토지와 재산을 빈민에게 분배했다.[88] 회계군에서 토착민, 망명자를 사적으로 숨겨주던 회계군 고래의 명족 우량을 적발하여 처형했다.[89] 또한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형해화된 수재와 효렴 제도를 재정비했다.[90]유유는 "신제"라 불리는 가혹한 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현장급 이상의 관리가 부모 간호를 이유로 직무를 떠나려 할 경우 금고 3년의 벌을 과한다"[91], "강도를 한 자는 참수형, 그 가족도 공개 처형"과 같은 내용이 《송서》에 남아 있다.[92] 유의를 타도한 직후에는 강릉 백성들에게 압정으로 인한 피폐를 염려하여 조세 부역의 면제를 선언했고,[93] 황제 즉위 후에는 국내 각지에 대사를 파견하여 각지의 상황을 청취했다.[94] 동진 시대에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북부와 서부를 각각 황족이 다스리도록 정했다.[95]
유유 정권에서도 대옹, 종병, 주속지, 왕홍지, 완만령, 공순지, 유응지, 공기, 도잠, 종욱지, 심도건, 곽희림, 뇌차종과 같은 인물들이 유유의 초빙을 거부하고 은거했다. 《송서》 편찬자인 심약은 그들의 행동을 비판하고 있다.[96]
혜교의 『고승전』에는 유우와 불교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혜원은 유우의 은인인 왕밀과의 교류를 돈독히 하였고,[97] 유우는 혜원의 덕망을 신뢰하고, 노순과의 교우로 인한 혐의를 묻지 않았다.[98] 환현 타도 후, 왕밀은 길거리에서 저포에 열중하는 자들의 땅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그 장소를 파보니 유우와 거의 같은 높이의 불상이 발굴되었고, 유우는 불상을 정성껏 공양했다.[99]
부다발다라는 서방에서 온 승려로, 유우는 그를 만나자마자 크게 존경하며 경전 번역 사업을 원조했다.[100] 혜관은 강릉에 머물며 유우와 교우를 했다.[101] 혜엄은 유우의 후진 정벌에 길 안내 역할을 맡았다.[102] 지엄은 유우가 후진 토벌에 나섰을 때, 동행했던 랑야 왕씨의 시흥공 왕회에게 발탁되어 건강으로 초빙되었다.[103] 승홍은 청동으로 불상을 주조했다가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유우로부터 사면받았다.[104]
혜의는 유우에게 신이 황제 즉위에 즈음하여 보물을 산에 숨겼다는 예언을 전했고, 유우는 그에게 재보를 찾아오도록 명하여 무사히 획득한 뒤 그를 중용했다.[105] 또한 유우의 측근 중 한 명인 범태로부터 존숭을 받고, 기원사의 기증을 받았다.[106] 법화는 유우에게 중용되어 건강의 승려들의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107] 승도는 관중의 수비 책임자인 유의진을 지원했고, 혁련발발의 습격을 받았을 때 몸을 던져 유의진을 지켰다. 그 때문에 건강에 들어간 후, 유우에게 크게 중용되어 유우의 아들들의 교육을 맡았다.[108][109] 도조를 초청한 법회에서 유우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기뻐했다.[110]
5. 평가와 논란
유송의 무제는 남북조 시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116] 그의 지휘 아래, 남중국 제국은 북부를 수복하는 데 가장 근접했다.[116] 그가 북서부에서 획득한 영토는 빠르게 상실되었지만, 그의 원정은 남조가 황하를 따라 방어하는 이점을 갖게 했고, 북쪽의 선비족 국가가 동화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독립적인 남중국 국가를 보존했다.[116]
유유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 긍정적 평가:
- 군사적 능력: 서민들은 군기가 엄정한 유유의 부대를 신망했다.[116] 환현은 유유를 "일세의 영웅"이라 칭하며 중원 평정의 적임자로 여겼다.[118][120][121] 남연의 한범은 유유에게 천명이 깃들었다고 평가했다.[123] 후진의 요흥은 유유가 진(晉)을 부흥시킨 것을 칭찬하며 남양군을 포함한 12개 군을 반환했다.[125] 북위의 최호는 유유가 모용수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130] 동진의 안제는 유유의 공적을 위대하다고 칭송하며 확실한 포상을 약속했다.[122]
- 개혁: 심약의 『송서』, 이연수의 『남사』에서는 유유가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무위를 떨쳐 지위를 구축하여 실질적인 것으로 송나라를 성립했다고 평가한다.[135] 당나라의 우세남과 남조 양나라의 배자야는 유유가 조조와 사마의에 필적하는 훌륭한 관리 재능을 가졌으며, 유방과 유수의 기풍을 갖췄다고 평가했다.[137] 명나라의 손승은은 유유가 청렴하고 엄정한 태도를 관철한 황제로서 어울리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147] 왕부지는 유유가 중화 민족을 괴롭혀 온 이적(夷狄)의 국가를 멸망시킨 무위를 보여주었다며, "한 이후, 당에 이르기까지, 그래도 중화의 주(主)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 유송 정도일 것이다"라고 칭찬했다.[149]
- 기타: 오두미도의 서도복은 유유의 지휘 능력을 두려워했다.[124] 신기질은 영우락에서 손권과 유유를 나란히 칭송하며 용장이라고 칭찬했다.[144]
- 부정적 평가:
- 찬탈 및 폭정: 동진 황족 사마국번은 유유가 진의 왕실 및 황족 중 세력을 가진 자들을 해치려 한다고 비판했다.[127] 사마휴지는 유유가 교만해져 황실을 압박한다고 규탄했다.[128] 도연명은 송(宋)의 연호를 기피하는 형태로 유유에 대한 불만을 표명했다.[134] 소방등은 유유가 은혜와 원한에 좁은 소견을 보였다고 평가했다.[138] 주경칙은 유유가 쓰러뜨린 적이 강적이 아니며, 공신의 자손이 귀하게 남지 않았고, 관중에서 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고 비판했다.[139] 소철은 유유가 관중을 중요시하지 않고 선양(禪讓)을 요구한 것을 비판했다.[142] 엽적은 유유가 장안을 확보하지 못하고 찬탈과 옛 진(晉) 황제 살해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비판했다.[145] 이탁오는 유유가 황제 살해라는 대죄를 범해 그 죄가 자손에게 돌아갔다고 비판했다.[148] 청나라의 건륭제는 유유가 탁월한 무(武)를 찬탈에 사용했다고 비판했다.[152]
- 기타: 혁련하의 왕매덕은 유유의 조치가 취약하다고 평가했다.[131] 하거비는 유유가 관중 유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143]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유유의 남연 학살 행위와 관중 조기 상실을 비판했다. 원나라의 호삼성은 공제(恭帝) 살해를 언급하며 이후 황위를 넘겨준 군주가 살아남는 경우가 드물어졌다고 평가했다.[146]
- 중립적 평가:
- 두목은 수나라의 양견과 유유를 비교하며, 양견은 무(武)에서는 유유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산동(山東) 획득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140]
- 장위는 유유의 공적이 이윤과 주공단에 비견되지만 찬탈로 인해 유송의 국운이 다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141]
- 증선지는 『십팔사략』에서 유유와 유방의 뱀 관련 에피소드를 비교하며 유유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 뱀을 상처 입혔다고 평가했다.
- 방포는 유유가 약한 기반, 늙음, 어린 자식들 때문에 만족스러운 후계 체제를 확보할 수 없어 황제 살해라는 흉행을 저질렀다고 평가했다.[150]
- 채동번은 『남북사연의』에서 유유의 문무 능력을 찬탈에 맞춰 운용했다고 평가하며 사악한 계략으로 자손이 파멸했다고 비판했다.[153]
-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 격문에서 유유를 모반자, 찬탈자와 동등하게 취급했다.[155]
- 미야자키 시테이는 유유 시대에 동진의 국위가 극대화되었지만, 이는 동진과 이질적인 세력에 의한 것이며, 선위 후 공제 살해를 무의미한 행위로 평가했다.[160]
- 가와카쓰 요시오는 유유의 대두가 북부 군벌의 자기 발전 연장선이며, 선양극을 허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희극이라고 평가했다.[162]
- 깃카와 타다오는 유유가 천부적인 실행력으로 개혁을 추진했지만 천자가 된 후 행동력이 퇴색되었다고 평가했다.[163]
- 가와모토 요시아키는 화북 지역에서 유송의 정통성이 의문시되었으며, 유유가 환온·환현으로 이어진 황제 선위 흐름을 이었다고 평가했다.[164]
- 후지이 리쓰유키는 유유가 무력을 배경으로 출세하여 정통성 확립에 고심했지만, 지방 정권에 안주하여 낙양 환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165]
- 마루하시 미쓰히로는 유유 이후 한문 무인이 실권을 잡고 정권을 수립하여, 한문층과 문벌 귀족층의 긴장 관계가 생겨났다고 평가했다.[166]
5. 1. 긍정적 평가
유송의 무제는 남북조 시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116] 그의 지휘 아래 남중국 제국은 북부를 수복하는 데 가장 근접했다.[116] 비록 그가 북서부에서 획득한 영토는 빠르게 상실되었지만, 그의 원정은 남조가 황하를 따라 방어하는 이점을 갖게 했고, 북쪽의 선비족 국가가 동화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독립적인 남중국 국가를 보존했다.[116]동진의 안제는 유유의 환현 타도가 정규 절차를 밟지 않은 거병이었음에도 그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한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고 고백하며, 그의 위대한 공적에 대한 확실한 포상을 약속했다.[122] 남연의 한범은 유유에게 천명이 깃들어 사람의 지혜로는 미칠 수 없는 일이 되었다고 평했다.[123] 후진의 요흥은 유유가 미천한 신분으로 일어나 진(晉)을 부흥시킨 것을 칭찬하며 빼앗았던 12개 군을 반환했다.[125]
북위의 최호는 유유의 재능이 모용수보다 뛰어나다고 평하며, 미천한 출신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점을 높이 평가했다.[130] 안제는 유유에게 구석(九錫)을 내리며 동진 부흥, 환현 토벌, 남연 토벌 등 아홉 가지 큰 공적을 열거했다.[132] 심약의 『송서』, 이연수의 『남사』에서는 유유가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무위를 떨쳐 지위를 구축했다고 평가하며, 이는 명목으로 성립된 위(魏)와 진(晉)과 달리 실질적인 것으로 성립되었다고 기록했다.[135] 당나라의 우세남과 남조 양나라의 배자야는 유유가 훌륭한 관리로서의 재능은 조조와 사마의에 필적하지만, 그 틀에 갇힐 인물은 아니라고 평가했다.[137] 또한 우세남은 유유가 유방의 쾌활함과 유수의 열린 마음을 갖추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137]
남송의 신기질은 『영우락』에서 손권과 유유를 나란히 칭송하며, "중장 기병이 땅을 울리고, 만 리를 삼킬 듯한 호랑이와 같은 기세를 발하는, 저 용장"이라고 칭찬했다.[144] 명나라의 손승은은 유유가 반석 같지 않은 입장에서 유례없는 무력으로 입신하여 청렴하고 엄정한 태도를 관철했으며, 황제로서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147] 왕부지는 중화 민족을 오랫동안 괴롭혀 온 이적(夷狄)의 국가, 남연과 후진을 멸망시킨 유유의 무위를 격찬하며, "한(漢) 이후, 당(唐)에 이르기까지, 그래도 중화의 주(主)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 유송(劉宋) 정도일 것이다"라고 칭찬했다.[149]
5. 2. 부정적 평가
유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그의 찬탈 행위와 그 과정에서의 황제 살해, 그리고 통일 제국을 이루지 못한 점에 집중된다.- 찬탈과 황제 살해: 사마국번(司馬國璠)은 유유가 진나라 왕실과 황족 중 세력이 있는 자들을 해치려 한다고 비판했다.[127] 사마휴지(司馬休之)는 유유의 무공을 인정하면서도, 그 교만함이 황실을 압박한다고 규탄했다.[128] 왕부지(王夫之)는 유유의 찬탈과 옛 황제 살해를 큰 실책으로 지적하며, 특히 그 죄가 심각하다고 비판했다.[149] 엽적(葉適)은 유유가 장안을 확보하지 못하고 찬탈을 행하며 옛 진나라 황제를 살해한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비판했다.[145] 이탁오(李卓吾)는 유유의 황제 살해라는 대죄가 자손에게 돌아갔다고 비판한다.[148] 장위(張翬)는 유유가 안제를 도와 진나라의 무위를 높인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탈이라는 대역죄를 저질러 유송의 국운을 다하지 못하게 했다고 평가한다.[141]
- 통일 실패: 소철(蘇轍)은 유유가 관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선양을 요구한 것을 비판하며, 어짊이 부족하면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142] 하거비(何去非)는 유유가 관중 유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을 비판하면서도, 이는 남연 정벌 이후 노순(盧循)에게 멸망 위기에 처했던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천하 통일의 기회를 잃었다고 평가한다.[143] 주경칙(朱敬則)은 유유가 쓰러뜨린 적이 강적이 아니었고, 장안을 조기에 상실한 점 등을 들어 군자로서의 덕이 의문시된다고 평가했다.[139]
- 기타 비판: 소방등(蕭方等)은 유유가 왕밀(王謐)을 구원하고 조규(刁逵)를 살해한 일을 대비하며 소견이 좁다고 평가했다.[138] 도연명(陶淵明)은 직접적인 비판은 없지만, 송나라의 연호를 기피하는 형태로 유유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134]
5. 3. 종합적 평가
유송의 무제 유유는 남북조 시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116] 그의 지휘 아래 남조는 북부를 수복하는 데 가장 근접했다. 비록 그가 획득한 북서부 영토는 빠르게 상실되었지만, 그의 원정은 남조가 황하를 따라 방어하는 이점을 갖게 했고, 북쪽의 선비족 국가가 동화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독립적인 남중국 국가를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116]유유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 긍정적 평가:
- 군사적 능력: 서민들은 군기가 엄정한 유유의 부대를 신망했다.[116] 환현은 유유를 "일세의 영웅"이라 칭하며 중원 평정의 적임자로 여겼다.[118][120][121] 남연의 한범은 유유에게 천명이 깃들었다고 평가했다.[123] 후진의 요흥은 유유가 진(晉)을 부흥시킨 것을 칭찬하며 남양군을 포함한 12개 군을 반환했다.[125] 북위의 최호는 유유가 모용수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130] 동진의 안제는 유유의 공적을 위대하다고 칭송하며 확실한 포상을 약속했다.[122]
- 개혁: 심약의 『송서』, 이연수의 『남사』에서는 유유가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무위를 떨쳐 지위를 구축하여 실질적인 것으로 송나라를 성립했다고 평가한다.[135] 당나라의 우세남과 남조 양나라의 배자야는 유유가 조조와 사마의에 필적하는 훌륭한 관리 재능을 가졌으며, 유방과 유수의 기풍을 갖췄다고 평가했다.[137] 명나라의 손승은은 유유가 청렴하고 엄정한 태도를 관철한 황제로서 어울리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147] 왕부지는 유유가 중화 민족을 괴롭혀 온 이적(夷狄)의 국가를 멸망시킨 무위를 보여주었다며, "한 이후, 당에 이르기까지, 그래도 중화의 주(主)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 유송 정도일 것이다"라고 칭찬했다.[149]
- 기타: 오두미도의 서도복은 유유의 지휘 능력을 두려워했다.[124] 신기질은 영우락에서 손권과 유유를 나란히 칭송하며 용장이라고 칭찬했다.[144]
- 부정적 평가:
- 찬탈 및 폭정: 동진 황족 사마국번은 유유가 진의 왕실 및 황족 중 세력을 가진 자들을 해치려 한다고 비판했다.[127] 사마휴지는 유유가 교만해져 황실을 압박한다고 규탄했다.[128] 도연명은 송(宋)의 연호를 기피하는 형태로 유유에 대한 불만을 표명했다.[134] 소방등은 유유가 은혜와 원한에 좁은 소견을 보였다고 평가했다.[138] 주경칙은 유유가 쓰러뜨린 적이 강적이 아니며, 공신의 자손이 귀하게 남지 않았고, 관중에서 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고 비판했다.[139] 소철은 유유가 관중을 중요시하지 않고 선양(禪讓)을 요구한 것을 비판했다.[142] 엽적은 유유가 장안을 확보하지 못하고 찬탈과 옛 진(晉) 황제 살해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비판했다.[145] 이탁오는 유유가 황제 살해라는 대죄를 범해 그 죄가 자손에게 돌아갔다고 비판했다.[148] 청나라의 건륭제는 유유가 탁월한 무(武)를 찬탈에 사용했다고 비판했다.[152]
- 기타: 혁련하의 왕매덕은 유유의 조치가 취약하다고 평가했다.[131] 하거비는 유유가 관중 유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143]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유유의 남연 학살 행위와 관중 조기 상실을 비판했다. 원나라의 호삼성은 공제(恭帝) 살해를 언급하며 이후 황위를 넘겨준 군주가 살아남는 경우가 드물어졌다고 평가했다.[146]
- 중립적 평가:
- 두목은 수나라의 양견과 유유를 비교하며, 양견은 무(武)에서는 유유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산동(山東) 획득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140]
- 장위는 유유의 공적이 이윤과 주공단에 비견되지만 찬탈로 인해 유송의 국운이 다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141]
- 증선지는 『십팔사략』에서 유유와 유방의 뱀 관련 에피소드를 비교하며 유유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 뱀을 상처 입혔다고 평가했다.
- 방포는 유유가 약한 기반, 늙음, 어린 자식들 때문에 만족스러운 후계 체제를 확보할 수 없어 황제 살해라는 흉행을 저질렀다고 평가했다.[150]
- 채동번은 『남북사연의』에서 유유의 문무 능력을 찬탈에 맞춰 운용했다고 평가하며 사악한 계략으로 자손이 파멸했다고 비판했다.[153]
-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 격문에서 유유를 모반자, 찬탈자와 동등하게 취급했다.[155]
- 미야자키 시테이는 유유 시대에 동진의 국위가 극대화되었지만, 이는 동진과 이질적인 세력에 의한 것이며, 선위 후 공제 살해를 무의미한 행위로 평가했다.[160]
- 가와카쓰 요시오는 유유의 대두가 북부 군벌의 자기 발전 연장선이며, 선양극을 허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희극이라고 평가했다.[162]
- 깃카와 타다오는 유유가 천부적인 실행력으로 개혁을 추진했지만 천자가 된 후 행동력이 퇴색되었다고 평가했다.[163]
- 가와모토 요시아키는 화북 지역에서 유송의 정통성이 의문시되었으며, 유유가 환온·환현으로 이어진 황제 선위 흐름을 이었다고 평가했다.[164]
- 후지이 리쓰유키는 유유가 무력을 배경으로 출세하여 정통성 확립에 고심했지만, 지방 정권에 안주하여 낙양 환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165]
- 마루하시 미쓰히로는 유유 이후 한문 무인이 실권을 잡고 정권을 수립하여, 한문층과 문벌 귀족층의 긴장 관계가 생겨났다고 평가했다.[166]
6. 가계도
부모 | 유교(효황제), 조안종(효목황후), 소문수(효의황후) |
---|---|
배우자 | 장애친(무경황후), 호도안(문장황태후), 장궐(영양왕태비), 손수화, 왕수용, 원미인, 손미인, 여미인, 부수의 |
황자 | 유의부(유송 소제), 유의진, 유의륭, 유의강, 유의공, 유의선, 유의계 |
황녀 | 유흥제(회계선공주), 유영남(오흥소공주), 광덕공주, 선성공주, 신안공주, 오선공주, 시안애공주, 유혜원(의흥공주), 유흔남(예장강공주) |
6. 1. 부모
유송 무제의 부친은 효황제 유교(劉翹)이며, 모친은 효목황후 조안종(趙安宗)이다. 계모는 효의황후(孝懿皇后) 소문수(蕭文壽)이다.6. 2. 후비
무경황후(武敬皇后) 장애친(臧愛親, 360년 ~ 408년)은 유송 건국 후 추존되었으며, 회계선공주(會稽宣公主) 유흥제를 낳았다. 회계선공주는 서괴지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다.문장황태후(文章皇太后) 호도안(胡道安, 368년~ 409년)은 문제 즉위 후 추존되었으며, 셋째 아들 유의륭을 낳았다.
영양왕태비(營陽王太妃) 장궐은 생전 작위가 부인(夫人)이었으며, 유의부와 의흥공주(義興恭公主) 유혜원을 낳았다.
수화(修華) 손씨는 둘째 아들 유의진을 낳았고, 수용(修容) 왕씨(? ~ 432년)는 넷째 아들 유의강을 낳았다. 미인(美人) 원씨는 다섯째 아들 유의공을, 미인 손씨는 여섯째 아들 유의선을, 미인 여씨는 일곱째 아들 유의계를 낳았다.수의(修儀) 부씨(符氏)는 셋째딸 광덕공주를 낳았다.
이 외에도 생모 불명으로 오흥소공주(吳興昭公主) 유영남, 선성공주, 신안공주, 오선공주, 부양공주, 시안애공주, 예장강공주(豫章康公主) 유흔남이 있었다.
6. 3. 황자
유송 무제는 무경 황후 장씨와의 사이에서 장녀 회계선공주 유흥제를 두었으며, 회계선공주는 동해의 서괴지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다. 장부인 소생으로는 장남 소제 유의부와 의흥공주 유혜원이 있다. 장황태후 호씨는 삼남 문제 유의륭을 낳았다.손수화는 차남 여릉효헌왕 유의진을 낳았고, 왕수용은 사남 팽성왕 유의강을 낳았다. 원미인은 오남 강하문헌왕 유의공을 낳았고, 손미인은 육남 남군왕 유의선을 낳았으며, 여미인은 칠남 형양문왕 유의계를 낳았다.
이 외에도 부수의는 삼녀 광덕공주를 낳았고, 생모 불명으로 오흥소공주 유영남, 선성공주, 신안공주, 오선공주, 부양공주, 시안애공주, 예장강공주 유흔남이 있다. 오흥소공주는 낭야의 왕언과 결혼하여 왕현원을 포함한 자녀를 두었고, 선성공주는 주교, 신안공주는 왕경심, 오선공주와 시안애공주는 저담지, 부양공주와 예장강공주는 서교지와 결혼하였다. 예장강공주는 후에 하우와 재혼하였다.
6. 4. 황녀
유송 무제의 황녀는 다음과 같다.- 회계선공주(會稽宣公主) 유흥제(劉興弟, ? ~ 444년)는 무경황후 소생으로, 동해의 서괴지(徐逵之)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다.
- 오흥소공주(吳興昭公主) 유영남(劉榮男)은 낭야(琊瑯)의 왕언과 결혼하여 문목 황후를 포함한 자녀를 낳았다.
- 광덕공주(廣德公主)는 수의 부씨 소생이다.
- 선성덕공주(宣城德公主)는 주교(週嶠)와 결혼했다.
- 신안공주(新安公主)는 왕경심(王景深)과 결혼했다.
- 오군선공주(吳郡宣公主, ? ~ 476년)는 저담지(褚湛之)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다.
- 시안애공주(始安哀公主)는 저담지(褚湛之)와 결혼했다.
- 의흥공공주(義興恭公主) 유혜원(劉惠媛)은 영양국태비 소생이다.
- 예장강공주(豫章康公主) 유흔남(劉欣男, ? ~ 464년)은 서교지(徐喬之)와 결혼 후, 여강(廬江)의 하우(何瑀)와 재혼하여 자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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